저 살던 곳에는 또래 아이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맞은 편에 사는 피터와 옆 집에 사는 에밀리아, 이렇게 말하니 무척 가까운 것 같지만 쓸데 없이 거리가 멀어서 땡볕에 걸어가면 눈살이 절로 찌푸려 졌다, 그리고 셋길 따라 내려가면 나오는 강 건너에 사는 엔젤라와 자신이 마을 아이들의 전부였다. 물론 저희들보다 큰 언니나 오빠도 있었지만 어른들 일을 돕느냐 바쁘거나  어린애라고 어울려 주지 않는 일이 태반이라 이블린이 떠올리는 기억 속엔 그 세 아이들이 가장 뚜렸했다. 정작 자신도 형제자매가 없어 일을 도와야 했던 처지였지만.


(사진에 브금 있습니다.)



W. 아가

 푸른 새싹이 하나 둘 자라나는 고운 흙 옆으로 난 모래 길을 아이들은 덥지도 않은지 한 줄의 발자국을 남기며 달려왔다. 이비! 아, 피터의 목소리였다. 앳띤 소년의 우렁찬 목소리에 자그마한 이파리조차 흔들린 것 같았다. 엉기성기 짜인 밀짚 모자 밑으로 초록 눈이 들어났다. 짧은 금색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지럽힌다. 들어난 눈에 피터의 옆에서 저를 보며 뭐라뭐라 칭얼거리는 에밀리아가 보였다. 이블린은 일은 안 하고 흙장난만 치던 호미를 내려 놓고는 쪼르르 아이들에게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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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이블린은 요령이 없었다. 그 당당한 성정은 그대로인데 사람 다룰 줄을 몰라 언제나 에밀리아가 가는 눈꼬리를 흘기도록 만들었다. 에밀리아는 대체적으로 자신을 미워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어린아이의 시기심이었을지도, 그녀만의 애정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후자는 아닐 것 같다. 에밀리아는 피터와 엔젤라에겐 지나치게 친절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미움 받은 것은 저 뿐이었나? 몇 번의 언쟁 끝에 이블린은 결국 에밀리아가 자신의 것보다 크다고 주장하는 사과를 넘겨줘야 했다. 옆에서 안절부절 못 하는 피터와 엔젤라가 가여워서였다. 사과를 받는 에밀리아는 순간 굉장히 기쁜 표정을 지엇지만 금세 아닌 척 뾰로퉁한 얼굴을 지었다. 왜 그러는지 도통 모르겠지만 이블린은 못 본 척 넘어갔다.



주근깨가 박힌 불그스름한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한다. 에밀리아의 곱게 땋인 붉은 머리카락이 허공을 위아래로 휘저었다. 내말 듣고 있는 거야?! 비명같은 소녀의 외침에 이블린은 벌이 춤추듯 회전하는 소녀의 머리카락에서 눈을 들었다. 이런. 자신이 딴청을 피웠다는 것을 눈치 챈 에밀리아의 파란 눈에 금세 눈물이 방울졌다. 너는 항상 그런 식이야. 에밀리아는 울음섞인 목소리를 토해냈다. 우리가  데리러 안 오면 먼저 오지도 않고 혼자 딴청이나 피우고 꼭 어디 가버릴 것 같은 사람처럼! 너 하는 거 보면 꼭 파커 오빠 같단 말이야. 에밀리아는 결국 엉엉 소리내어 울어 버렸다. 피터와 엔젤라가 옆에서 진땀을 빼며 달래려 했지만 별로 소용은 없어 보였다. 이블린은 그 셋을 뒤로 하고 홀로 모래길을 되돌아 왔다.



파커는 피터의 형이었는데 몇 달 전 쯤 혼자서 말도 없이 기차를 타고 도시로 떠나버렸다. 그는 마을의 오빠 언니들 중에서도 자신들을 가장 잘 챙겨주었었고 그 중에서도 에밀리아는 유독 파커와 사이가 좋았었다.



자신이 파커 오빠 같다니 말도 안 됬다. 식탁에 앉은 이블린은 멀건 콘스프를 내려다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비슷하단 건지 모르겠고 뭐가 문제라는 지도 몰랐다. 떠나기 전의 파커 오빠는 어딘가 달랐나? 글쎄, 자신으로썬 느끼지 못 한 부분이었다. 어쩌면, 에밀리아는 제 생각보다 섬세한 아이일지도 몰랐다. 인상쓰는 모습에 밥투정으로 착각한 엄마에게 꾸중을 들었지만 이블린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다음날 아침, 이블린은 부러 일찍 집을 나서서 옆집 에밀리아네로 향했다. 얼굴이 퉁퉁 부은 에밀리아가 놀란 눈을 하고 쳐다 보았다. 그게 그리 놀랄 일인가. 이블린은 속 마음을 내지 않았다. 에밀리아는 멍청이야. 덤덤하게 내뱉어지는 목소리에 아멜리아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조금 안쓰럽기까지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블린은 개의치 않는 척 말을 이어갔다.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어린 소녀가 파커처럼 훌쩍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내가 좀 이뻐? 중간에 납치되서 팔려가 버릴지도 모른다고. 이블린은 그리 말하며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에밀리아도 마주 웃었던 것 같다. 



어린 이블린은 잘 웃지 않았던 것 같다. 자신은 즐거울 때 웃고 슬플 때 울었지만 지금처럼 이유 없이도 잘 웃진 않았다. 그런 자신이 습관처럼 웃게 된게 무슨 계기인지 아마 그녀는 평생 모를 것이었다. 에밀리아는 다음날부터 평소대로 돌아왔다. 조금 제멋대로에 시기심 많은 작은 소녀 에밀리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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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블린은 눈을 떴다. 책상에 전등 불을 켜 둔 채로 깜빡 졸아버린 모양이었다. 책상 위의 편지지에는 가지런한 글씨들 끝에 왕창 번진 잉크 자국이 선명했다. 이블린은 입을 비죽였다. 아까운 편지지 하나가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대학을 위해 이 곳으로 온 후로 아이들과는 연락하지 못 했다. 안 한건가. 못 한 건가. 어쩌면 아멜리아의 아니 비단 아멜리아 뿐만아니라 피터나 엔젤라의 원망 섞인 목소리를 듣기 싫은 걸지도 모른다. 겁쟁이네. 이블린은 앉은 자리서 웃어 버렸다. 자신은 선잠을 잘 잤지만 꿈은 잘 안 꿨다. 그리고 아마, 그 아이들의 꿈을 꾼 것도 이게 처음인 것 같다. 아멜리아의 무심하단 말이 뭔지 조금 와 닿았다. 어린 시절 자신이 해아리지 못한 소녀의 걱정이 이제서야 알 법 했다. 그럼에도 자신은 돌아갈 수 없었다. 돌아가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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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랑팔랑. 민들래 씨앗은 자리도 모르고 허공에 흔들렸다. 번쩍거리는 조명 아래에 은은하게 빛내는 하얀 씨앗은 지나치게 수수했고 이질적이었다. 눈에도 잘 보이지 않을 씨앗을 향해 손을 뻗는 너 또한 그랬다. 지나치게 순수하고 맑다. 과장된 제 말에 따르는 어린아이같은 순진한 대답에 꾸며 웃던 자신이 조금 부끄러웠던걸 너는 알까. 아마 모를 것이다. 에밀리아도 너도 모를 것이고 그래야 했다.



그래서 좋았던 것 같다. 화려한 옷과 먹음직한 음식과 웅장한 음악에도 이블린은 이질감을 쉬이 떨쳐내지 못 했다. 어색함을 표하는 대신  부러 웃어 보이는 얼굴을 사람들은 별 의심 없이 받아 들였다. 익숙하게 춤을 추고 꾸며 웃는 얼굴들은 결코 재밌지 못 했다. 말을 나누면서도 어울리지 못 하는 자신에, 무도회에 오게 된 것을 조금, 아주 조금 후회 할 때, 나는 너를 만났다. 너는 화려한 그림들 사이에 놓인 물감 흔적 하나 없는 캔버스였다.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음에도 어느 것 보다 눈에 잘 들어왔다. 이블린은 과장되게 말하며 웃었지만 그 웃음은 비단 거짓이 아니었다. 



저는 누구와도 잘 어울리고 어디서도 주눅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그 어느 곳에도 쉽게 정착하지 못한다. 아무나와 잘 어울리면 제대로 된 제 사람이 없고 어디서도 주눅들지 않으면 곁에서 있어 줄 사람이 었으니까. 나는 민들래 씨가 되어 높다란 가을 하늘을 떠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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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남다름과 반짝이는 눈동자에 또 만나겠다 속으로 맹세했지만 그 후로 차차 잊혀지리라 생각 했던 것 같다. 날아 든 종이 비행기에 할 말을 잃었던 것을 보면 그랬다. 어리둥절한 자신에게 당당하게 데이트 신청을 하는 너에 나는 또 한 번 함박 웃음을 지었다. 갈 곳을 잃고 정처 없이 떠도는 민들래 씨앗에게 작은 손이 날아들었다. 무도회장에서 씨앗 하나를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 꼭 쥐던 작은 손은 이젠 제 손을 잡고 있었다. 날아가지 않게 떠돌지 않게 잡아주는 손이다. 너는 모른다. 그 손의 온기가 저만 아는 소녀에게 얼마나 크게 와 닿았는지. 

"이비! 새로 생긴 디저트 가게가 있데요.  같이 가지 않을래?"
"그래, 그러자. 그나저나 달링 덕에 살찌겠어-."

웃음기 섞인 농담에 카르멘은 눈을 굴렸고 이내 이비는 살쪄도 이쁘니까 괜찮다는 결론을 내렸다. 고르게 다듬어진 계단을 내려가는 소녀들의 주위에 웃음 소리가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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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땅 위의 민들래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나 해바라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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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 방으로 돌아온 이블린은 책상에 앉아 언젠가 신사로부터 잔뜩 받은 편지지 중 그럭저럭 쓸만 한 것을 골라 보았다. 톡톡. 섬세한 손 끝이 책상을 두드렸다. 서두는 뭐가 좋을까.

"디어, 에밀리ㅇ.... 아, 아니야. 이상해."

아무래도 오늘 밤, 쉬이 잠들기는 그른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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