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위협적이었다. 시위를 놓은 소리가 들렸다. 명중이었다.
“운명이라.”
嫄 荷鯉 | 신 운명
이른 시간이었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어 보였음에도 한 번 잠에서 깨어버리니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오도카니 어슴푸레한 바깥을 바라보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뜩이나 좋지 못한 시력에 어둑한 길은 몹시도 위험해 보였지만 어린 날부터 지내온 제집과도 다름없는 신당이기에 하리는 별다른 주의 없이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순례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날이 되면, 멋 모르던 소녀들은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을 터였다. 견습신녀들은 정식으로 인정받고 저만의 무사를 맞이할 것이었다. 자신의 무사. 그는 어떤 이일까. 저를 지켜줄 유일한 존재. 그 짐은, 아마 자신의 것만큼이나 묵직하겠지. 의지가 되고 싶다. 곧 만나게 될 그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들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에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운명으로 역인,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기던 와중에 들리는 말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운명.”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위협적이었다. 활시위를 놓은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있었다.
“운명이라.”
아, 그는 아마 신당에 머물고 있는 무사 중 한 명일게 분명했다. 빛조차 마땅치 않은 새벽에 흐린 시야로는 그 형태만을 어렴풋이 가늠할 뿐이었지만 낯선 목소리가 그리 가르쳐 주었다. 혼잣말 같은 그의 중얼거림은 단편적이라 그의 숨은 뜻을 다 알 수 없었지만, 방금까지 저도 같은 단어를 떠올리고 있었던 터라, 어째선지 하리는 쉽게 연결해 버렸다.
떠오르는 생각들에도 그를 방해하고 싶진 않았기에 어느정도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기만 하려 했건만, 날라온 애기살은 예상치 못하게도 천을 찢고 여린 피부를 스치고 간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워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소녀가 몸을 움츠렸다. 뒤늦게야 아릿한 아픔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닌 새벽에 웬 밀행이더냐.”
무심한 질책의 말이 떨어졌다. 상처를 감아쥐고 눈만 깜빡이던 소녀가 그런 그의 말에 재빨리 입을 연다. 그 ····, 그런 뜻은 없었어요. 다급하게 흘러나온 말은 너무나도 작아 바람에 금세 흩날려 버린다. 무어라 했느냐.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다가오던 그가 정승처럼 우뚝 선 채 멈췄다.
“설마….”
이어지는 말이 없었다. 문득 찾아온 적막에 상처
를 향하던 눈이 사내를 향했다. 여전히 뿌옇게만 보였지만 그의 시선이 제 상처에 닿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하얀 옷자락에 배어나는 붉은색만이 아닌 새벽에 적나라하게 눈에 띠었다. 소녀가 증에 찌푸렸던 미간을 피고 애써 웃어 보인다. 회색 눈동자가 낮게 깔렸다.
"죄송해요. 방해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 폐를 끼쳐 버렸어요."
의도한 것은 아니니, 너무 노여워하지 말아 주세요. 띄엄띄엄, 하지만 차분하게 소녀는 저 할 말을 전한다. 땅에 닿아 있던 시선이 이내 사내의 얼굴에 닿았다. 그리고, 괜한 참견인 것은 알지만,
운명을, 그로인한 인연을,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는 말아주세요.
소녀의 작은 소망이었다. 자신의 미래의 무사에 대한, 그리고 그의 신녀를 위한. 공백제외 1146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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