嫄 荷鯉 | 신 바램
"부질없지 않아요."
가만히 듣기만 하던 하리가 끝끝내 내뱉은 말이었다. 이제 자신의 소원을 알려달라던 그녀에 대한 답이라기엔 조금 엇나간 말이었지만, 안 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정말로 부질없지 않아요. 차분한 목소리가 각인이라도 시키듯 되뇌며 소녀를 바라봤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흔들리던 눈망울이, 떨리던 손길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애써 웃음 짓는 얼굴 뒤로 가려진 처연함이 눈앞에 선했다. 늦은 밤, 잠 못 이루던 이가 저뿐이 아니라는 것에, 그리고 그런 그녀의 위태로운 모습에 놀랐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자신이 잠들지 않은 것이 다행으로 여겨졌다. 그러니까 ····.
"얘기해줘서 고마워요."
아까까지만 해도 제 옷자락을 잡고 있던 손을 맞잡았다. 그리하면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아슬아슬한 그녀를 지탱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하리는 소녀의 고운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뿌연 시야에도 붉은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고운 손. 형태가 제대로 보이지 않아도 자신은 알 수 있었다. 남들보다 어렵다 하여도 자신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색을 잃은 그녀의 눈엔 이 붉은색마저 또 다른 회색으로만 보일 터였다. 무서울 만도 하였다. 뿌연 시야조차 잃을까 싶어 자신도 이토록 두려운데 태어나 본 세상이 남과 다르다면, 같은 세상을 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면, 두려운 게 당연했다.
소원 ····. 한동안 소녀의 손끝만 바라보며 말을 고르던 하리가 눈을 들었다. 최대한 초점을 맞추려 노력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는 오래 살고 싶어요."
진지하게 말을 꺼내고도 그녀가 오해할까 하리는 눈동자를 굴렸다. 먹색보다 훨 옅은 두 눈이 고심하는지 주위를 맴돌다가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다시금 움직인다.
"그러니까 ···· 누군가를 두고, 먼저 떠나고 싶지 않아요."
가는 길은 초연하다. 하지만 남겨진 이는 그렇지 못하단 것을, 하리는 너무도 잘 이해했다. 제가 사라져, 누군가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저로 인해 누군가 상처받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살아 있다면 힘이 없어도 누군가를 위해 노력할 수 있지만, 자신이 이 세상을 영영 떠나버리면 그마저도 불가능해지는 것이 두렵다. 잃고 싶지 않다. 상처 주고 싶지 않다.
내뱉는 목소리는 담담하다. 내리뜬 눈에 짙게 드리운 속눈썹이 잘게 떨리는 것은 비단 새벽바람 탓은 아니었다.
"···· 하지만 부질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허공을 향했던 눈동자가 가예를 바로 마주 보았다. 변함없이 잔잔하지만, 전보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 거칠 것 없이 바라보며 하리는 잡은 손을 그러 쥐었다.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기 때문에 가능한 것도 있다고 생각해요. 비록, 색을 볼 수는 없다고 해도, 남들처럼 오래도록 살아갈 순 없어도, 그래도, 이 생각들이, 고민이 부질없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가예, 그런 생각 말아요. 알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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